원두 봉투 뒤의 레시피는 왜 다 똑같이 생겼을까
원두를 다섯 군데에서 사 보면 봉투에 적힌 추출 가이드가 서로 베낀 것처럼 닮아 있습니다. CUP-TIMER에 모인 로스터리 공식 레시피는 79곳, 126개입니다. 그중 뜨거운 레시피 105개의 중앙값은 비율 1:16, 물 온도 94°C, 원두 18g, 추출 시간 3분이고, 126개 중 96개가 V60을 씁니다.
범위를 좁혀도 마찬가지입니다. 105개 중 82개(78%)가 1:15~1:17 안에 들어가고, 시간이 적힌 102개 중 71개가 2분 30초에서 3분 30초 사이에 끝납니다. 가장 많은 비율은 1:16으로 30개, 그다음이 1:17 21개, 1:15 18개입니다.
게으른 것도, 다 같이 하리오를 따라한 것도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의 주방에서도 먹을 만해야 하는" 레시피는 원래 이렇게 수렴합니다.
가운데로 모일 수밖에 없는 이유
로스터리 공식 레시피는 대회 레시피와 목적이 다릅니다. 그라인더도, 물도, 주전자도, 실력도 모르는 사람이 따라 했을 때 실패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조건이 모든 변수를 중간값으로 밀어붙입니다.
1:16은 조금 덜 추출돼도 커피 맛이 나고, 조금 과추출돼도 못 마실 정도는 아닌 농도입니다. 93~94°C는 라이트 로스팅을 끌어내면서 미디엄을 태우지 않는 지점이고요. 3분은 원두 15~20g을 원추형에 중간 분쇄로 내렸을 때 대체로 나오는 시간입니다. 게다가 79곳 중 58곳은 공식 레시피를 딱 하나만 공개합니다. 그 하나가 그 로스터리의 모든 원두, 모든 로스팅 단계를 감당해야 하는 셈이죠.
그래서 나온 기본값은 실제로 꽤 좋습니다. 베를린 더 반 V60은 16g에 250g, 94°C. 덴마크 라 카브라는 15g에 250g, 96°C. 국내 커피리브레 핸드드립은 18g에 280g, 95°C입니다. 나라도 성격도 다른데 소수점만 옮긴 같은 레시피입니다.
같은 1:16인데 온도는 90°C부터 100°C까지
여기서부터가 요약이 감추는 부분입니다. 비율이 정확히 1:16인 뜨거운 레시피 30개만 따로 떼어 나머지 항목을 보면, 물 온도는 90°C에서 100°C, 추출 시간은 2분 15초에서 4분 15초까지 벌어집니다. 분쇄도도 중간 15개, 중간-가늘게 9개, 중간-굵게 3개로 갈립니다.
즉 비율은 모두가 합의한 숫자이자, 그래서 아무것도 구별해 주지 못하는 숫자입니다. 같은 1:16이라도 하나는 90°C로 4분, 다른 하나는 100°C로 2분 15초면 전혀 다른 커피가 나옵니다. 로스터리 가이드를 비교할 때 비율부터 보는 습관은 버리셔도 됩니다.
진짜 개성은 온도에 적혀 있습니다
온도가 적힌 뜨거운 레시피 87개 중 61개가 93~97°C에 모여 있지만, 전체 범위는 83°C에서 100°C까지 17도나 됩니다. 그리고 양 끝은 우연이 아닙니다.
뜨거운 쪽 끝에는 코펜하겐 프롤로그 커피가 있습니다. 15g에 250g, 물은 100°C 그대로입니다. 반대쪽 끝에는 도쿄 글리치 커피가 있고, 16g에 260g을 88°C로 2분 30초 만에 내립니다. 둘 다 라이트 로스팅을 하고, 둘 다 평판이 좋습니다. 섬세하고 산미가 높은 커피를 두고 정반대 판단을 했을 뿐입니다. 프롤로그는 열로 추출을 밀어 올리고, 글리치는 온도를 낮춰 향을 지킵니다.
로스터리 가이드에서 딱 하나만 가져오신다면 온도를 가져오세요. 그 집이 가장 오래 고민한 숫자이고, 집에서 내리는 사람이 가장 안 건드리는 숫자입니다.
진하게 내리고 물 타기 — 국내 바이패스 계열
"다들 1:16으로 내린다"는 요약이 완전히 지워 버리는 흐름이 하나 있습니다. 국내 로스터리 몇 곳은 V60에 진한 농축액을 받아 놓고 나중에 물을 섞습니다.
블랙업커피 모노 바이패스는 18g에 물 180g만, 그것도 83°C로 내린 뒤 서버에 뜨거운 물 60g 이상을 더해 농도를 맞춥니다. 최종 1:13.3이지만 그 물이 원두층을 지나간 적은 없죠. 네로 블렌드도 85°C로 같은 방식입니다. 아메리카노와 같은 논리입니다. 원하는 만큼만 뽑고, 농도는 깨끗한 물로 따로 정하는 거죠. 낮은 온도와 1분 45초짜리 짧은 접촉으로 쓴맛을 잘라내고, 모자란 농도는 뒤에서 맞춥니다. 로우키는 더 극단적이어서 20g에 140g, 1:7로 받습니다.
부산 모모스커피도 1:15 바이패스를 쓰고, 공개 레시피가 1:5부터 굵은 분쇄에 4단 푸어로 내리는 1:18까지 펼쳐져 있습니다. 레시피를 아홉 개 공개한 로스터리는 모두를 위한 가이드 하나를 쓰는 게 아니라, 원두마다 방법을 붙여 주는 겁니다.
양을 늘릴 때 무엇을 고정하는가
로스터리가 용량을 바꿀 때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는지 보면 그 집의 생각이 보입니다.
빈브라더스는 1:16과 93°C를 고정한 사다리를 공개합니다. 1인분 20g → 320g, 2인분 30g → 480g, 대용량 50g → 800g까지 비율은 그대로입니다. 대신 분쇄도가 움직입니다. 대용량은 1인분보다 35% 굵게. 원두층이 깊어지면 같은 설정에서도 배수가 느려지기 때문입니다. 아이스는 반대로 뜨거운 레시피보다 25% 가늘게 갑니다.
카운터 컬처는 다른 걸 고정합니다. V60도 칼리타 웨이브도 케멕스도 전부 1:17에 93°C입니다. 대신 분쇄도가 원추형에서 중간-가늘게, 평평한 바닥에서 중간, 케멕스에서 중간-굵게로 한 칸씩 굵어지고, 총 시간도 3분 45초에서 4분 30초로 늘어납니다.
두 방식이 같은 말을 합니다. 비율은 장비를 바꿔도 따라오지만, 분쇄도는 따라오지 않습니다.
아이스는 연한 버전이 아니라 다른 레시피
126개 중 21개가 아이스인데, 이 21개는 뜨거운 합의를 아예 버립니다. 중앙값이 1:10이고 그중 12개가 정확히 1:10입니다. 물의 일부가 이미 서버 안에 얼음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죠. 빈브라더스 아이스는 얼음 50~60g 위에 20g/200g으로 내리고, 교토 쿠라스는 칼리타 웨이브에 16g/150g을 90°C로 받습니다.
국내 로스터리는 아예 HOT과 ICED를 한 쌍으로 공개하는 곳이 많습니다. 뜨거운 가이드만 있는 원두를 아이스로 마시고 싶다면, 추출수를 뜨거운 레시피의 60% 수준으로 줄이고 그 차이만큼을 얼음으로 서버에 넣은 뒤 분쇄도를 4분의 1쯤 가늘게 잡으면 됩니다.
로스터리 레시피를 읽는 법
- 비율 비교는 건너뛰세요. 대부분 1:15~1:17입니다. 그 집의 성향을 거의 알려주지 않습니다.
- 온도부터 보세요. 자기 로스팅을 어떻게 다뤄 주길 바라는지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숫자이고, 공개된 범위만 17도 폭입니다.
- 분쇄도는 지시가 아니라 설명입니다. "중간"은 그 집 그라인더에서의 중간이니까요. 대신 적혀 있는 추출 시간을 목표로 삼으세요. 30초 이상 어긋난다면 잘못된 건 분쇄도입니다.
- 그 집 레시피는 그 집 원두에. 로스터리 가이드는 자사 로스팅 프로파일에 맞춰져 있습니다. 팀 웬델보의 리터당 65g 레시피가 잘 맞는 건 팀 웬델보의 로스팅을 위해 쓰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내려 보기
- 더 반 V60 — 1:16, 16g → 250g, 94°C
- 커피리브레 핸드드립 — 18g → 280g, 95°C
- 테라로사 핸드드립 V60 — 1:15, 19g → 280g, 94°C
- 빈브라더스 V60 HOT — 1:16, 20g → 320g, 93°C
- 블랙업 모노 바이패스 — 18g → 180g, 83°C, 이후 바이패스
- 모모스 1:18 — 1:18, 18g → 324g, 95°C
- 글리치 핫 드립 V60 — 1:17, 16g → 260g, 88°C
- 프롤로그 커피 V60 — 1:16.7, 15g → 250g, 100°C